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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빛들(2010~11)

아 연극, 내겐 너무 매력적인 그

'일상'은 아니고…, 나의 이야기        http://our_colors.blog.me/110102813432 

 

 

 

'그’를 사랑하고 있다.



 

2009년 9월 27일 오후 5시, <요새 젊은 것들은?>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12명의 배우와 5명의 스텝이 공연장 한가운데 모여 앉았다. 수많은 시선 속에 달구어졌던 몸의 열기도 식었고, 뜨거웠던 박수소리도 아련해져 갔다. 더는 다음날 공연을 위해 바쁘게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허무하기도 하고, 뿌듯한 성취감도 들고, 고생했던 지난날들도 스쳐 가고, 즐거웠던 작업과정도 떠올랐다. 다같이 실컷 울고 나서야 나는 그가 생각났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꽤 어렸을 적부터다. 처음엔 있어 보인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남들이 -오~ 와 같은 반응을 보이면 내가 특별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꿈을 말할 때 흔하지 않은 그를 적어내는 건 으스대고 싶은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정말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생생히 기억난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한 마루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놀이를 하자고 하셨다. 강의실을 쥐가 있는 곳,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곳,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늪이 있는 곳 등의 상황을 가진 여러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러고는 -자, 시작 이라는 말과 함께 자유로운 연기 시간이 주어졌다. 쭈뼛쭈뼛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며 놀이 아닌 놀이를 시작했지만 다들 차차 진지한 태도로 각자의 상황에 집중하여 연기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 시간을 보내다 문득, 나는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의식하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인생의 연극 첫 경험.
-아 이것이 연기고 창조고, 이렇게 연극을 하는 거구나, 하고 말이다.
둘러본 주위가 조금 웃겼던 게 사실이다. 맨바닥에서 누군가는 들리지도 않는 음악을 듣고 있고, 또 누군가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누군가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행복해하고…… 분명히 그 모습이 웃기는데, 왠지 모르게 뭉클하면서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빈 마룻바닥에서 눈빛과 동작과 소리로 만들어지는 무언가에 대한 감동이 아니었을까.
그 날, 나는 그의 진짜 매력을 보았고 지금까지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얻었다.

<요새 젊은 것들은?>의 공연 준비가 점점 바빠지면서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해 졌다. 하지만, 일에 치여 새벽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조금만 더, 한 대목만 더, 이 작업만 더, 하면서 욕심을 내다보면 아침이 왔다. 시험공부나 과제를 하면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침이었다. 밤새 컴퓨터 게임을 하며 경험한다는 개밥 바라기 같은 친구 녀석의 동조는 뒤로하고, 그 아침은 진정으로 짜릿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아직 모르겠는 것은, 현실의 문제다. 말로만 들을 적엔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가 보여주는 현실을 진하게 경험하고 있다. 제일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삼으라는 말에 예전보다 -정말 그럴지도, 라고 긍정하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 문제가 되고, 작업하는 사람 간의 관계도 너무 어렵고, 관객들의 비난도 감당하기 힘들고, 작품과의 사투도 장난이 아니고,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소모를 요구하고, 그럼에도 진행해나가야 하고, 또 즐거워야 하고…….
그래서 공연장 한가운데서 펑펑 울었다. <요새 젊은 것들은?>을 통해 첫 연출과 공연을 해냈지만, 그가 현실을 들이밀며 이제 시작했음을 알렸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 시작해 볼 준비가 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대답은 -어쩔 수 없어 였다.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는 -이렇게 힘들어서 못 해먹겠어, 라고 해놓고선 대학로를 벗어나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한 번 판 벌일 구상하며 설레어 하는 내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어쩔 수 없다, 고 생각했다. 달달하지만은 않겠지만 아무렴 어때, 좋다.

벌써 2011년이 되어버렸으니, 이 모든 이야기가 오래 된걸 지도 모르겠다. 아니, 오래되었다. 그 사이 나는 1년의 복학생활을 했고, 또다시 휴학생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것보다는, 무대 위의 장면을 만들고 싶고, 그가 내민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깨지고 망가지면서 치열하게 연극을 해보고 싶다. '연극이 좋아'라는 나의 말에 -오~, 와 같은 반응 말고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라는 고민거리를 받고 싶다.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짝 소리 나도록 하이파이브하며 작업도 하고 싶다. 작업하느라 흥에 겨워 밤을 새운 짜릿한 아침도 다시 맞이하고 싶다.

사실,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겨 이번 겨울부터, 다시 휴학하고 지금 새로운 연극을 만나고 있다. 'TAXI,TAXI'

프로 연극계에 첫발이다. 막내로서 밑 단계부터 시작하는. 말로는 치열하게 해보고 싶다고 자신 있게 말해왔는데, 반짝반짝 빛날 줄 알았던 그곳이 정말 힘들고 어렵고 전쟁터라는 사실을 요즘 몸으로 느끼고 나니 좀 쉬운 길은 없나 툴툴거리게 된다. 그러나 믿는다. 이 또한 3월이 오고 공연이 올라가고..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순간에 엄청난 진심들만을 가려주겠지. 그날을 위해 나는 지금 버티는 중이다. 다음에 이런 글을 쓰는 그날에는 '끔찍하게 즐거운 놀이터(다른 분의 말을 빌려)'에서 실제로 겪은 더 많은 일을 적어가며 또 한 걸음 나아가길 기대한다.

2009년에 창단해서 함께 <요새 젊은 것들은?>을 창작했던 극단 ‘난장이들이 쏘아 올리는 희망의 공연단’은 한 해 활동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처음엔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눈물 콧물에 진한 화장이 엉망진창으로 번진 기분이었는데, 경험과 사람을 얻었다 생각하고 지금은 충분히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놀아보고 싶어서 판을 벌이고, 좌충우돌 진행해서 결국은 공연을 올리고, 또 진했던 시간을 뒤로한 헤어짐까지 경험해보고 나니, 진심만이 남았다. 더는 예쁘게만 빛나는 꿈을 꾸는 소녀가 아니다. 만화책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로맨스에 대한 환상은 모두 접고, 그와 살을 맞대고 달콤하지만, 또 구질구질한 연애를 시작했다. 오로지 내가 그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치열하게 또 진지하게 그의 앞에 서려 한다.


아 내겐 너무 매력적인 그, 연극.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